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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주의 건축

    Posted in 건축계획/참고자료

    2014. 9. 16. 12:24

    신자유주의와 목구조의 전통적 대응

    Neo-Liberalism

    지난 세기는 인류가 그 동안 이루어 왔던 문명의 성과물이 무색할 정도의 과학기술의 유래 없는 진보와 더불어 인간의 이성이 자연에 도전하고 서구의 합리주의와 기능주의가 세계를 지배한 시대였다. 경제적 합리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한 지도 200년이 넘었고, 모더니즘과 국제주의라는 명분 아래 세계는 하나의 연결고리 상에 묶이게 되었다. 이는 최근 들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란 이름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가장 두드러지는 지표가 된 듯해 보인다. 시장경제원리가 세계질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소수의 이익 집단인 , 소위 말하는 Global Elite들과, 일부 대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며, 이 논리가 얼마나 생산노동계층과 일반 대중들의 이익과 권리를 침해하는지 이제야 그 진상의 일부나마 수면 위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 거대한 흐름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는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집단 최면상태의 불특정다수이다.

     

    이는 노암 촘스키가 신자유주의 비판 논문집인 「Profit Over People」에서 언급했듯이 국민, 곧 대중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소비자’로 취급되고 거대 국제자본과 기업이 국가를 지배하는 시장경제 논리이다.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극단적 보편주의의 흐름은 경제와 전혀 관련없는 분야까지 예컨대 문화, 예술, 사회복지, 종교, 심지어 교육에까지도 침투되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피터 마쿠스(Peter Marcuse)가 ‘The Language of Globalization'에서 언급했듯이,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특정한 형태이며 자본주의적 관계의 지리적인 넓이와 깊이를 나날이 인간 삶의 여러 측면에 파고듦으로써 확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문화전략을 추구하는데, 이것은 자연스럽게 대중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그들을 지배하고 종속시키며, 그리고 동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문화는 우리가 세계 내에서 이해하며, 다투는 그 모든 것, 즉 이미지, 욕구, 언술, 정체성, 정신영역, 그리고 지적이며, 미학적 작업 일반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다. 부에 대한 가치를 더욱 상향 이동시킴으로 해서 왜곡된 가치를 만들어 왔고, 이것은 분리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공동체의 붕괴를 증대시키며, 소비주의를 최고의 문화적 가치로 떠받든다.

     

    우리가 스스로 원한건 아니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인적, 정보적, 물적 자원들이 빠른 속도로 교류하게 되었고, 건축은 다양성과 복합성을 본질로 하는 사회상황을 담아내는 공간의 가변성, 역동성, 유연성을 창조하는 새로운 시각의 공간개념이 요구된다. 이러한 근거로 선진국들은 근대주의가 그러했듯이 보편화된 틀 안으로 세계의 건축을 집어넣으려 하고 있고, 한국의 건축계도 이에 부응하려 5년제 건축대학의 설립 같은 교육의 틀을 바꾸는 등 나름대로의 획기적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대자본에 의해 프로그램 된 건축시장은 차치하고라도, 문화적 관점에서의 건축의 세계화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개방과 변화에 대한 요구에 필요한 대응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더 이상 외국 기업과 건축가들에 의해 잠식당할 우리 건축시장을 지키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세계는 공통의 건축적 언어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이 보편주의는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저항하고 경계해야할 여지가 있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제시하는 인류 공동의 과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대한 심도 있고 구체적인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건축언어의 세계화에 따른 건축의 외연적 텍토닉에 집착하기보다는,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따른 지속가능성에 대한 세부적인 전략이 요구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응하는 새로운 형태의 지역주의 건축이 필요한 것이다.

    Neo-Vernacular Architecture

    뉴 칼레도니아의 티바우 문화센터(Jean Marie Tjibaou Cultural Centre)는 목구조의 텍토닉한 측면과 전통요소들이 재 조합된 프로젝트 중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렌조 피아노(Renzo Piano)와 폴 빈센트(Paul Vincent)이 공동으로 진행한 이 프로젝트는 그림에서 보여지듯이, 각각의 전통적 요소들이 최고의 엔지니어들에 의해 가동된 하이테크의 믹서 속에 잘 혼합되어 현대적인 얼굴로 다시 태어났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고유의 전통과 건조환경에 따른 디자인 방법론을 찾는데 있어서의 보편화된 현대적 건축언어의 어려움을 드러냄과 동시에 가능성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 전반에 걸쳐 보여 지듯이, 철저하게 서구의 기계론적 잣대로 원주민들의 전통을 분석하고, 해부하여 재조합한 결과물이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렌조 피아노는 이 건물이 그가 타 지역에서 진행했던 실험적 작품 중에 가장 무모한 것 중의 하나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것이 단순한 민속적 모방, 저속한 공예품이나 미적인 영역으로의 빗나감 등의 함정에 빠지는 두려움이 이 프로젝트 전반에 걸친 끊임없는 근심거리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이 가지는 미학체계, 철저하게 지역풍토에 대응한 디자인 전략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뉴 칼레도니아의 지역적 정체성은 어떤 것이었을까. 문화우월주의자들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이상하고 신기한, 그리고 때로는 이해하지 못할 관습이나 형태들, 이러한 것들을 서구의 이성으로 해부하고 분석하여 현대건축의 텍토닉한 언어로 재조합한 결과물일까. 천재의 수작에 대한 범인의 부질없는 편견일 수 도 있지만, 어쨌든 이 프로젝트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는 뉴칼레도니아의 새로운 문화수렴을 위한 장으로서, 그리고 지역의 특수한 풍토를 수용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그리고 ‘Low Impact High Contact’ 라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약속을 이행한 개발로서, 그리고 뉴 칼레도니아의 자연적 경관과 하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건물로 여겨진다.

    목구조와 지역주의 건축

    우리가 경계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세계화라는 것은 사실 뚜렷한 실체가 없다. 변형된 자본주의적 관계의 지리적 넓이와 깊이를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문화전략의 추구라는 면에서 보면 이미 대항할 수 없는 형태의 문화적 침투가 존재하는 반면에, 쉽게 동화되고 변형될 수 없는 고유의 정체성 또한 새로운 다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21세기 불확실성의 시대, 또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있어서 건축가와 건축의 역할은 무엇인가. 새로운 흐름에 대응하기 위한 건축은 건축행위 자체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되며, 인문 사회학적 변화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전통과 첨단, 인간과 자연, 그리고 해야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건축언어의 세계화에 따른 건축의 외연적 텍토닉에 집착에 집착하기보다는, 지역 고유의 정체성과 이에 따른 지속가능성의 실현에 대한 일관적인 세부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정체성과 개방에 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일고 있는 사이에, 이미 우리는 보편화된 건축언어와 낯선 기술로 건축행위를 해 오고 있다. 미처 검증해 볼 시간적 여지도 없이 서구의 낯선 목구조 공법은 이제 우리의 생활공간을 만드는 중요한 방식이 되어 버렸다. ‘새로운 주택문화의 창조’라는 상업적 명분 아래 불어 닥친 전원주택 열풍은 이 거대한 시장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미 확산되어 버린 상업적 건축문화가 비난받을 특별한 명분은 없다. 목구조는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친 환경 건조 방식이 되었고, 인식을 하건 아니건 간에 이 행위를 하고 있는 건축인 이라면 모두가 친환경주의자이며 깨어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흐름을 지켜보는 일이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많은 부분에서 이미 서구식으로 표준화되어버린 자재와 설계방식, 그리고 건물형태는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건축행위로 인식되어 가고 있고,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영화 속의 마을, ‘트루먼 쇼’의 실제 배경이 된 플로리다의 ‘Sea Side'의 그림 같은 풍경은 이미 낮선 풍경이 아니다. 디즈니사에서 기획하고 분양한 ‘Celebration’ 이라는 ‘Theme Park’적인 리조트 타운과도 유사한 마을이 ‘살고 싶은 땅, 꿈꾸는 마을’로 그림 그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Disney Paris’ 나 'Disney Tokyo‘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디즈니사는 제2, 제3의 ‘Celebration’을 해외에 기획중이다. 전 세계의 ‘디즈니화’와 ‘맥도날드화’라는 말을 이제 쉽게 들을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과대망상적인 발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지역적 정체성 회복에 관한 논의가 이 거대한 흐름에 조금이라도 저항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까.

     

    전통과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늘 조심스럽고 부담스럽다. ‘그렇다’, ‘아니다’의 이분법적 비평에 늘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과물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렌조 피아노의 고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작가라면 누구나 이러한 ‘변(辯)“을 준비해야 하는 강박관념조차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듦의 건축, 생김의 건축

    동서양의 세계관과 건축관을 비교하는 논문에서 김성우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듦의 건축에서는 만든 자가 자신의 만듦에 대한 설명을 하려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만드는 행위가 만든 자 개인의 권한이고 책임으로 귀속되고 나면 내가 만든 것이 어떻게, 또 모두에게 얼마나 정당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창조의 보편적 당위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서양건축의 전통에서는 끊임없이 이러한 보편적 당위성을 위한 자기 해명이 요구된다.... 서양건축이 합리성을 끈질기게 확보하려는 경향도 뚜껑을 열고 보면 개인적 만듦과 보편적 당위성 사이의 거리를 메우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양건축의 합리성 추구는 그러한 의미에서 끝없는 자기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

     

    생김의 건축은 자기변명을 하지 않는다. 변명을 할 주체도 없고 그 변명을 들어줄 상대도 없다. 만듦의 건축은 기하학적 원리나 합리적 이유를 들어서 납득시킬 수 있으나 생김의 건축은 훨씬 더 불규칙하고 무작위적 즉흥성을 갖기 때문에 만듦의 건축보다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러한 설명을 시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스스로 생겼을 때 스스로가 자기설명이고 이유일 뿐 다른 생김의 원인과 이유가 따로 없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전통건축은 이론이 없는 것처럼 오해되기도 한다......”

     

    우리가 전통이나 정체성에 관한 논의 때마다 곤란을 겪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가 그 동안 교육받고 작업해온 방식이 다분히 서구적 이성과 논리에 의한 해부학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이라 판단할 때 이러한 작업에 대한 해명과 주장은 주체도 객체도 분명하지 않은 자신감 없는 변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해명에 대해 너무도 가혹한 비평과 격려의 인색함에 대한 두려움 또한 우리 스스로를 억누르는 행위는 아니었을까. 미흡하더라도 용기와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단순한 민속양식의 모방, 저속한 공예주의라는 비판에 부딪히더라도 재료의 물성과 서구적 미학체계에 무리하게 집착하는 일부 건축행위에 대한 우려만큼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 것’에 대한 정체성을 포기하지 말고 우리의 건축관을 어떻게 새롭게 자리 매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꾸리찌바의 교훈

    "꿈의 도시, 희망의 도시, 존경의 수도."

     

    대전만한 크기의 브라질의 한 도시, 꾸리찌바를 세계의 많은 언론과 전문기관들은 이렇게 부른다. 제3세계의 보잘것없는 이 도시가 이렇게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부분의 도시가 재정부족 및 행정적 애로사항을 들면서 시민을 위한 여러 정책들을 포기할 때, 이 도시는 시장 및 관리들의 창조적이고 헌신적인 노력과 주민들의 참여로 그러한 문제들을 지혜롭고도 훌륭하게 해결해내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1세계가 아닌 제3세계의 가난한 지방도시에서 그러한 실험이 가능했다는 것은 21세기의 정치가나 행정가, 그리고 시민들에게 새로운 도시 및 인간 패러다임의 새로운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나 싱가폴의 모범적인 도시계획과는 달리, 꾸리찌바를 만든건 Garden City 개념 같은 서구의 구성적 이상향도 아니었다. 전문가, 관리, 그리고 시민참여가 만든 남미식 이상향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화, 또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그러나 명백한 실체도 없는 흐름에 대항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우리 식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의 ‘자리 매김’에 대한 노력이 부족하다면 문화적 중심성과 주변성에 대한 소모적이고 식민지적인 논의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2002. 11.30 서울교육문화회관 - 2002년 목조건축 송년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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